내가 사랑한 성경
<박희천 자서전. 내가 사랑한 성경> (DMI, 2017)
서평
4/17/20231 min read
들어가가(서론)
자서전은 인생의 보물창고요 광맥이다. 신앙성장과정에 구체적인 모델이 된다. 3년전 펜데믹 시작할 즈음 필자는 <성경, 나의사랑 나의생명>(국민북스, 2020)을 출판하였다.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라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성경읽기의 좋은 모델은 없을까?’등 질문에 답하는 ‘단숨에 읽는 성경정경사’다. 본서에서 기독교 역사상 2명의 성경읽기 모델로 조지 뮬러 목사(1805-1898)와 박희천 목사님을 소개하였다.
<내가 사랑한 성경: 박희천 자서전>(국제제자훈련원, 2016)은 작은 책(192페이지)이지만 묵직하다. 서울 내수동 교회는 청년선교의 산실, 수 많은 목회자를 배출한 교회다. 박목사님은 금년 97세(1927년생)다. 1975-98 내수동교회 담임 23년. 1976-95년 총신대신대원 설교학/헬라어 28년 강의. 수 많은 후학/제자 목회자들은 목사님의 목양정신을 기억하며 “영적 스승”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필자는 30여년전 설교학 수업시간을 기억하며 2년전 늦가을에 신학교를 졸업 후 처음 은사목사님 아파트를 찾았다. 여전히 하루 7시간씩 성경읽기를 계속하고 계셨다. “목사님은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의 정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결국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처럼 일평생 올곧고 한결같은 목회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목사님의 삶은 목회자를 넘어 평신도들에게, 신앙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 생생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p. 7. 오정현 목사 서문)
평양신학교. 숭실대학교. 고신대 신대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Th.M), 칼빈신학교서 공부. <성경의 설교론>, <사무엘상>, <사무엘하>,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왕국>, <북국 이스라엘> 등 저서.
성경을 사랑하여 성경을 더 알기 위해 목사가 된 목사님/뼛속까지 겸손하신 목사님/만남의 복을 받으신 목사님/목회의 정도 주제로 자서전에서 ‘직접 듣는’ 글쓰기 서평을 한다.
1. 성경, 나의사랑 나의 생명, 박희천 목사님: ‘성경을 알기 위해’ 목사가 되신 박목사님.
“마음 한 구석에서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자꾸 나를 부추겼다. 그와 함께 성경을 알고 싶은 마음 역시 불같이 일었다. 내 생각에 성경을 아는 지름길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사명감 보다는 성경을 알고 싶은 마음에 목사가 되고 싶었다.” (p. 24, 필자 강조, 사명감보다 성경을 알고 싶어 목사가 된 목사님)
1950년(24세때) 8월 6일 새벽에 쌀 한 말을 자루에 넣고 등에 지고 집을 나설 때, 기름종이이 싸 두었던 성경과 영어 책을 싼 보따리를 놓고 온 것을 기억! 다시 그 성경과 영어책을 싼 보따리를 가지러 집에 들어간 사이, 대략 12초간 순경과 대면을 피하였다. “그야말로 성경 덕분에 목숨을 건진”(p.33) 쓰릴 넘치는 12초간의 경험이 일생 성경사랑으로 이어진 것.
“나는 강해서를 낼 때마다 서문에 최원초(북한에서 만난 같은 노회 시찰) 목사님을 꼭 언급한다. 최목사님은 “빌립보서를 3,000번밖에 못 읽었다. 많이 못 읽었다”라고 하여 놀랐던 적이 있다. 최 목사님은 1947년도 연말까지 요한계시록을 1만번 읽었다. 새벽기도 마치고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을 한번 암송한 뒤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했다. 20분만에 암송하면 옆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고 18분만에 끝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말이 빨라진다. 요한계시록을 1만독 하시다니, 보통 분이 아니다. 성경을 그만큼 열심히 읽는 분은 좀처럼 드물다.” (p. 125, 필자 강조)
“나는 평생 최원초 목사님을 닮아 성경을 열심히 읽기 위해 애썼다. 주일 강단에서 힘 있는 설교를 하려면 본문을 보는데 만 하루 4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날마다 구약 2시간, 신약 2시간씩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69년을 매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고려신학교 다닐 때 학기 중에는 하루 4시간 읽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 꼬박 4시간씩 성경을 읽었다” (p. 125, 본서 자서전을 출판한 2016년 10월 현재까지)
“성경 공부에는 ‘한 방’이 없다. 성경 연구는 뜨개질과 같다”
“나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과 헬라어를 강의했는데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신학을 공부하는 3년동안 최소한 하루에 구약3장, 신약 1장을 읽어야 한다. 신대원 3년을 마치면 자동으로 성경 전문가가 된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고시 마친 다음 날 여러분은 ‘성경 유치원’에 재입학해야 한다. 그때부터 목숨 걸고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나는 신대원학생들에게 최단 기간에 신구약 성경을 100번 읽으라고 주문한다. 그것이 당회장이 되기 전에 해야 할 첫 번째 과업임을 강조했다.” (pp. 134-35, 필자는 신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지나도 아직도 성경 100독을 못했다. 불량학생이다. 그래서 아직도 당회장이 못 된 것이 분명하다).
“성경 공부에는 ‘한 방’이 없다. 성경 연구는 뜨개질과 같다. 사업은 잘만 하면 대박이 날 수 있다. 그러나 성경공부는 사업과 다르다. 한 코 한 코 통과하지 않고는 실력이 늘지 않는다. 일생 한 코 한 코 뜨개질하듯 성경을 알아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발견해가다가 이 땅을 떠나는 것이다.” (p. 135)
사전에도 없는 목사님의 ‘뇌리 성경 일람표’
“대심방을 하면서 각 가정을 방문할 때 나는 빈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백지상태로 방에 앉아 사람들과 3-4분 대회를 나누면서 그 집의 형편을 파악했다. 의사가 왕진 갈 때와 똑 같은 상황이다. 갑자기 아프다고 연락이 오면 의사는 허겁지겁 달려가지만, 진찰하기 전에는 확실한 병명을 모른다. 나 역시 집을 방문하여 사정을 알기 전에는 가정에 필요한 말씀을 알 수 없었다. 가정을 진단한 뒤 ‘뇌리 성경 일람표’에서 각 가정에 맞는 성경 구절을 찾아 처방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다” (pp. 94-95, 신학교 시절 각인된 이 ‘뇌리 성경 일람표’는 지금까지도 거의 매일 적극 활용하고 있다).
2. 뼛속까지 겸손하신 박목사님: “조금 건방진 말씀이지만…”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내가’가 아닐까 싶다. ‘내가’했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들어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내가’했다고 말하는 걸 가장 싫어하신다. 한국 교회 일꾼들 가운데 ‘내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걱정이다. 27세에 강력한 예방주사를 맞아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자신을 부인하며 산다” (p. 63, ‘내가’주장은 필자가 은연중에 많이 하고있다)
박목사님이 신학교시절 주일학교를 맡았을 때, 1953년 6월 즈음에 주일학생이 360명으로 늘어났다. 그 때 박 목사님은 “속으로 ‘내 손은 약손이야’라고 말하곤 했다”(p. 61). “아마도 그 때 교만이 하늘을 찔렀던 것 같다”고 회상. 그러나, 1954년 첫 주 예배에 참석한 학생은 130명. 처음 부임 때 보다 70명, 53년 때 보다 230명이 숫자가 적음을 놓고 곧바로 회개 기도를… 그래서 “1954년 1월부터 지금까지 나는 교만과 담을 쌓고 살아왔다. 간혹 젊은 목회자 중에 교만함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아직 53년 말이구나. 54년 첫 주를 지나야 돼’라고 말하곤 한다”(p. 63, 필자는 ‘아직 53년 말’ 인생이다)
대학부의 유명세: ‘내사모’(내수동교회 사역자 모임) 40여명.. 중대형 교회 목사로 성장.
“내가 1975년 내수동교회에 부임했을 때 현재 사랑의 교회를 담임하는 오정현 목사가 대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당시 대학부 학생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오정현 학생은 누가 대학부를 맡긴 것도 아닌데 열심히 달렸고, 1978년 대학부 여름수양회에는 80명이 참가했다. 참으로 대견한 일이었다. 합동 측 교회 중에 가장 교인이 많은 충현교회도 대학부 학생이 50-60명 정도였던 시절이었다” (p. 102)
“내수동교회에서 전도사를 지낸 목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현재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가 되었다.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남서울교회 화종부 목사,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 부산 부전교회 박성규목사, 대구 내일교회 이관형 목사가 그들이다.” (p. 106)
사실상 현재 한국교회 이름있는 중.대형교회 목회자들은 한결같이 내수동교회 출신이다. 박희천 목사님은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당신이 잘해서 그런 인물이 나왔다”라고 하는데 내 밑천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사람을 키운 적이 없다. 그런 재간도 없다.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그저 “세월이 지나고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p. 106 )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박희천 목사는 누구에게서 무엇을 배웠을까? 궁금해 진다. 만남이 곧 인생이다. 일생 중 누구를 만나서 어떤 영향을 받느냐가 그의 일생을 좌우하게 된다.
3. 만남의 복을 받으신 박희천 목사님: 최원초/한상동/박윤선/스킬톤 목사님)
박목사님은 전생애에 깊은 영향을 끼친 4분의 스승을 만나는 복을 받았다. “일생 네 분의 목사님으로부터 평생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한상동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최원초 목사님, 스킬톤 목사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내수동교회에서 목회도 잘 감당할 수 있었다.” (p. 117) 여기서는 2분만 소개한다.
3.1. 한상동 목사: ‘목회의 롤 모델을 만나다’
한상동(韓尙東, 1901-1976)목사는 고신대학교 설립자.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절. 평양감옥 6년 출옥. 박목사는 한상동 목사의 삼일교회(三一敎會) 부교역자로 부임하면서 6개월간 한상동 목사님 집에서 하숙. 2014년에 한목사님과 함께 생활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여 소책자 4천부 제작. “한 목사 서거40주년 기념회에서 1,000부를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p. 65)
“오늘 주일 아침 설교 준비가 안 되었는데 전도사님이 저를 대신하여 설교를…”
“1957년 7월 어느 주일 새벽, 한 목사님은 내가 사는 사택으로 찾아오셨다. “아직 오늘 주일 아침 설교 준비가 안 되었는데 전도사님이 저를 대신하여 설교를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자리에서 존경의 눈빛으로 한 목사님을 바라보았다. 목사님은 토요일 온종일 설교 준비를 하시며 밤을 세우면서 까지 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자 주일 새벽에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어떤 당회장이 주일 설교준비가 안되었다는 사실을 전도사에게 알리겠는가?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전도사에게 말하기 보다 강단에서 적당히 전하는 게 더 쉬운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섰다” (pp. 65-66, 정직하신 한상동 목사님의 인격이 참으로 귀하다)
한상동 목사의 목회철학: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어떤 망신/고생 달게 받으시는 분”
“주일 아침에 꼭 목사가 설교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 준비가 안 된 당회장이 나서서 교회에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 전도사가 전하드라도 교회에 유익을 준다면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아니겠습니까?” 한상동 목사님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생, 멸시, 희생, 망신, 모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는 철학을 갖고 계셨다. 전도사에게 설교 준비가 덜 되었다는 말을 하면서 망신을 당하고, 혹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하나님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그로 인해 어떠한 망신과 고생이 오더라도 달게 받으시는 분이었다. 이것이 바로 한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다” (p. 66, 이 같은 한상동 목사님의 교회사랑이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6년간 옥고를 치루셨을 것이다)
필자(서평자)도 집사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상동 목사님과 똑 같은 생각. 교회 교인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강대상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게 해야 맞지 않은가? 어떤 지역에 참으로 귀한 설교자/강사가 방문한다면 그 지역의 담임목사는 서로 다투어 그 분을 강사로 모시며 자기 교인들이 은혜를 받게 해야 함이 옳지 않은가? 교인 중 어느 평신도가 유능한 성경교사가 있다면 그에게 강단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상식이고 당연하지 않은가?
“바라고 의지하라.” 이것은 교회 행정에 있어 한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사람이 먼저 손을 대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해결해주실 때까지 바라고 의지했다. 때로는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 될 정도로 답답했지만 목사님은 여유를 갖고 끝까지 기다렸다. 한상동 목사님은 교회 직원, 특히 동역자들에 대한 인사 행정을 신중하게 하셨다. 평생 동역자들을 억울하게 내보낸 적이 없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내보내는 게 낫겠다 싶은 인물이 있었지만,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주님께서 선하게 해결하실 때까지 바라고 의지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가 좋은 마음으로 나가도록 해결해 주시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p. 67, 필자 강조)
한상동 목사님의 5가지 신앙: 정직/오직 말씀/인간 무력/오직 하나님의 주권/오직 하나님께 영광
“한상동 목사님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첫째, 정직하시다. 정직하시되 보통 정직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직하시다. 미련하다고 오해 받을 정도로 정직하시다” (p.117)
“당시 한상동 목사님은 교파를 초월해 전국적인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한 목사님은 언제나 “한상동, 넌 인간이다. 천사가 아니다”라는 것을 자각하셨다. ‘목사’라는 두 글자가 100개 있어도 마귀가 얼마든지 유혹할 수 있다. 한 목사님은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 다섯가지 신앙은 출옥 성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p. 120)
3.2 박윤선 목사님: “학문과 신학, 말과 행동이 일치하시는 분”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박목사님은 학문과 인격을 겸한 신학자이다. 일반대학에서 학문과 인격을 겸한 교수를 만나기 힘들다고 하는데 그건 신학교도 마찬가지다. 가까이서 지켜본 박윤선 목사님은 학문과 신학,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다. 생활이나 신앙이 여일한 분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박윤선 목사님은 가까이 할수록 더욱 존경심이 생기는 분이다. 나는 박윤선 목사님을 통해 설교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중략) 박윤선 목사님께 제대로 배워 훗날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칠 때 문자적 해석법을 충실히 전수 했다. 내 설교 스타일을 바꿀 수 있도록 잘 가르쳐 주신 박윤선 목사님은 나의 평생의 은인이다”. (pp. 122-124, 필자 강조)
필자도 박희천 목사님으로부터 설교학을 배웠다. ‘문자적 해석법’을 철저하게 배운 ‘내사모’의 목사들도 본문에 충실한 문자적 해석법에 따라 설교하는 목사들임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도 필자는 박목사님의 ‘성경뇌리일람표’를 자주 기억하며 매일 새벽 성경읽기에 몰입하고 있다.
“1971년 4월 말, (고려) 신학교에서 교내 부흥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 박윤선 목사님이 강사였는데 갑자기 몸이 아파 입원하시면서 강단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중략) 새로운 강사를 물색하던 학우회에서 느닷없이 나를 강사로 세우고 싶어 했다. 박윤선 목사님이 설 자리에 내가 서게 되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 기간에는 특별한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 그 때 딱 한번 학업을 전폐하고 한 주간 내내 부흥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중략) 나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평소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금식기도를 했는데 그때는 아예 일주일 내내 금식하면서 집회를 인도하기로 결”심했다” (pp. 76-77, 목회초기 이런 경험을 통하여 더욱 큰 담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4. 목회의 정도: ‘일평생 올곧고 한결 같은 진실한 참 목회자상’
4.1 설교에 중점을 두다: “주일 하루를 다른 곳에 가는 천 날보다 나은, 영적으로 복된 날로 만들어 드려야겠다 는 마음으로 설교에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오로지 설교를 잘하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었다. 설교는 인간이 잘 났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를 잘하고 못하는 건 성경을 얼마나 봤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성경은 똑똑하다고 보는 게 아니고 통솔력이나 행정력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러니 열심히 읽으면 된다. 그 사실에 용기를 얻어 설교에 주력하기로 했다.” (p. 84, 필자 강조)
4.2 철저한 출석 점점: “지독할 정도로 점검에 또 점검했는데 그 점에서 만큼은 나보다 열심히 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자부한다”
“설교를 철저히 준비하는 것과 함께 결석한 교인도 열심히 챙겼다. 내가 부임할 당시 내수동 교회의 장년 교인은 140여 명이었다. 1950년대에 주일학교 유년부를 맡았을 때 빠진 학생을 세밀하게 점검했던 경험을 살려 주일예배에 빠진 교인들을 챙기는 데 굉장한 신경을 썼다” (p. 86, 필자 강조)
“성인 교인의 이름 뿐만 아니라 아이들 이름도 다 외웠다. 매 주일 교회 문 앞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면 모두 좋아했다. 담임목사가 자기 이름을 안다는 사실을 모든 성도가 친근하게 생각했다. (중략) 교인 500명까지는 출석 점검이 9시 정도에 끝났지만, 800명으로 늘어나니 사무가 많아졌다. 밤9시가 넘어 전화를 걸면 실례여서 하는 수 없이 월요일까지 기다렸다” (p. 87)
4.3 목회성공의 비결: “’말하는 벙어리’처럼 살아보라”
“1982년 연말부터 1983년 초까지 교회에 어려움이 있었다. 교회의 시험은 주로 연말연시에 오는데 특별히 그해가 그랬다. (중략) 나는 그때 ‘결코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겠다’라고 결심했다.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니, 사람끼리 풀면 해결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다짐했다. ‘교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목사가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오해를 풀려고 하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니다’. 그때 떠오른 말씀이 시편 38편 13절이다.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개역한글). 온갖 험한 말이 들려올 때 다윗은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어려움을 아뢰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p. 109)
실제로 박목사님은 양지 총신대원 수업시간에 이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수 많은 목회자, 선교사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하는 것을 필자는 지켜보았다. 박 목사님은 “그 때 스스로 붙인 별명이 ‘말하는 벙어리’였다. 하나님께 만 말하고 사람 앞에서는 벙어리가 되자는 결심을 담아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나가기(결론): “성경을 먹어야 성경이 나온다”, “곱사등이 면할 생각하지 말라”
이 시대는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이다. 전 세계에 어디에 가도 교회가 있고 예수쟁이들이 존재하는 데 “왜 이 세상은 점점 어두워가고 있는가?” 이제는 상식조차 안 통하는 사회가 되었다.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영국을 봐도 그렇다. 한국은 더욱 심각하다. 이 모든 원인은 정치인 탓인가? 잘 못된 교육 탓인가? 아니다, 아니다. 필자는 확신한다. 예수쟁이가 깨어나 빛/소금으로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목사 선교사의 책임이다.
“곱사등이 면할 생각하지 말라.” 평생 책상 앞에 앉아 곱사등이가 될 정도로 공부하라며 내가 신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곱사등이 안 되겠다고 허리를 폈다가는 뒤로 벌렁 자빠진다. 공부하지 하지 않고는 나올 게 없다. 참기름병을 기울이면 참기름이 나오고, 석유병을 기울이면 석유가 나온다. 성경을 먹어야 성경이 나온다. 누에가 뽕잎을 먹지 낳고 명주실을 낼 수 없고, 은행에 예금하지 않으면 출금할 돈이 없다. 성경을 예금해 놓아야 성경을 출금할 수 있다. 성경이 들어가지 않으면 자꾸 다른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성경이 줄줄 나올 수 있도록 매일 성경을 가득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교인과 제자들에게 할 말은 “성경을 많이 읽으세요”밖에 없다.” (pp.135-36)
“성경 전체를 태산에 비유한다면, 69년간 성경 읽기에 죽을 힘을 다 했다고 해도 그저 태산 모퉁이를 손가락으로 긁다 만 정도라고 느껴진다. 성경은 간단하게 점령되는 책이 아니다. 그러므로 온 힘을 다해 성경을 읽어야 한다” (p. 134) 아멘 아멘. 할렐루야!


